샌디에이고에는 좋은 타자들이 많다. 당장 총액 2억 달러 이상의 대형 계약을 한 선수만 세 명(매니 마차도·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잰더 보가츠)이나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치는 것’에 의존한다는 비판이 많다. 끈질긴 승부를 하지 못하고, 치지 못하면 팀 타선이 죽는 경향이 있다. 계속 지적된 것이다.
이런 야구에서 빛나는 선수가 바로 김하성(29·샌디에이고)이다. 김하성은 다른 선수들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타격 성적도 그렇다. 타격보다는 수비와 주루에서 더 빛나는 선수일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샌디에이고 타자들이 가지지 못한 끈질긴 승부를 보여주고, 또 때로는 장타와 다른 방향에서 팀 타선에 공헌할 수 있는 선수다. 그리고 25일(한국시간) 김하성의 그런 장점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나왔다.
김하성은 25일 미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024 메이저리그’ 워싱턴 내셔널스와 경기에 선발 7번 유격수로 출전했다.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가 이날 경기를 앞두고 부상자 명단에 간 가운데, 김하성은 이날 7번 타순에 배치돼 3타수 1안타 1볼넷 1타점 2득점을 기록하면서 힘을 냈다. 시즌 타율은 종전 0.220에서 0.221로, 시즌 출루율은 종전 0.330에서 0.332로 조금 올랐다. 출루율과 장타율의 합인 OPS는 0.719다.
잰더 보가츠에 이어 타티스 주니어까지 빠진 샌디에이고는 이날 루이스 아라에스(1루수)-주릭슨 프로파(좌익수)-매니 마차도(3루수)-제이크 크로넨워스(2루수)-도노반 솔라노(지명타자)-잭슨 메릴(중견수)-김히성(유격수)-카일 히가시오카(포수)-브라이스 존슨(우익수) 순으로 타순을 짰다. 타티스 주니어를 부상자 명단으로 보내면서 마이너리그에서 올린 존슨이 선발 우익수로 들어갔다. 선발 투수로는 맷 왈드론이 출격했다.
워싱턴 선발로는 한때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견실한 좌완 중 하나였으나 어느덧 ‘최악 계약’의 상징 중 하나가 된 좌완 패트릭 코빈이 나섰다. 2022년 후안 소토 트레이드 당시 아쉽게 트레이드 패키지에 묶여 팀을 떠났던 한때 최고 유망주 CJ 에이브람스도 펫코파크에 돌아와 옛 팬들과 인사를 나눴다.
왈드론이 1회와 2회 위기를 잘 넘긴 가운데 3회 샌디에이고의 선취점이 김하성의 번트에서 나왔다. 샌디에이고는 선두 제이크 크로넨워스가 우전 안타를 치고 출루했다. 이어 도노반 솔라노가 좌전 안타로 뒤를 받치며 무사 1,3루를 만들었다. 하지만 후속 타자인 잭슨 메릴이 삼진을 당하면서 분위기가 꺾였다. 무사 1,3루에서 앞 타자가 삼진을 당했고, 후속 타자인 김하성에게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병살 가능성도 신경을 써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 예상치 못한 장면이 나왔다. 초구를 기다리던 김하성이 갑자기 번트 모션을 취했다. 수비는 비교적 정상 위치였다. 김하성은 코빈이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온 92.5마일 싱커에 번트를 댔다. 방향은 아주 좋았고, 속도도 잘 죽였다. 번트는 3루 파울 라인을 따라 구르기 시작했다. 번트가 성공된 것을 본 3루 주자 제이크 크로넨워스가 보조를 맞춰 홈으로 뛰어들었다.
번트가 파울 라인 바깥으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계산한 코빈은 공을 잡아 1루로 던졌지만 늦었다. 3루수도 번트를 예상하지 못해 대처할 수 없었다. 3루 주자 크로넨워스가 유유히 홈을 밟았고, 전력 질주한 김하성도 1루에 먼저 들어갔다. 3루 주자가 타자의 번트 타구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뒤 상황이 되면 홈으로 뛰는 세이프티 스퀴즈로 보였다.
현지 중계진도 감탄을 내뱉었다. 현지 중계진은 “아름다운(beautiful) 번트였다”고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중계진은 김하성이 번트를 잘 대 좋은 코스로 굴렸고 빠른 발로 1루까지 먼저 들어갔다며 선취점을 만든 이 상황을 호평했다. 단순히 치는 것뿐만 아니라 작전수행능력도 좋은 김하성의 장점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코빈이 허탈해 한 가운데 샌디에이고는 이어진 1사 1,2루에서 카일 히가시오카가 우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2루타를 쳤다. 2루 주자가 들어오는 건 문제가 없었고, 3루 주루 코치의 힘찬 팔동작에 김하성도 전력 질주해 비교적 무난하게 홈을 밟았다. 샌디에이고가 김하성의 두뇌 플레이로 경기 분위기를 장악한 뒤 3-0까지 앞서 나가는 순간이었다.
다만 이후 샌디에이고 공격에 풀이 죽었고, 워싱턴의 추격전이 시작됐다. 워싱턴은 0-3으로 뒤진 3회 1사 후 에이브람스의 2루타에 이어 2사 후 조이 메네세스가 적시타를 쳐 1점을 만회했다. 김하성은 3-1로 앞선 4회 2사 후 들어선 두 번째 타석에서는 2B-2S에서 5구째 낮게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하며 안타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워싱턴은 5회 다시 1점을 만회했다. 이번에도 친정팀에 돌아온 에이브람스가 선봉에 섰다. 선두 제이콥 영이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한 상황에서 에이브람스는 유격수 김하성 방면으로 강한 타구를 날렸다. 정상 수비 위치였다면 중견수 방면으로 빠져 나가는 안타성이었으나 수비 시프트가 걸려 김하성이 그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타구는 김하성의 글러브를 맞고 옆으로 튀었다. 공식 기록은 내야 안타로 1루 주자와 타자가 모두 살았다.
리그에서 잘 뛰기로 유명한 팀인 워싱턴은 1사 후 영과 에이브람스가 더블스틸을 성공시켜 2,3루를 만들었고 2사 후 조이 메네세스가 투수 방면 내야안타를 쳐 3루 주자를 불러들여 2-3으로 추격했다.
샌디에이고가 도망가지 못한 사이 워싱턴은 2-3으로 뒤진 7회 동점을 만들었다. 1사 후 에이브람스가 또 안타를 치고 나가 기회를 만든 가운데 레인 토마스의 삼진 때 에이브람스가 2루 도루에 성공해 득점권에 갔다. 그리고 제시 윙커의 내야 안타로 2사 1,3루를 만든 뒤 조이 메네세스가 다시 좌전 적시타를 쳐 3-3 동점을 만들었다. 에이브람스가 나가면, 메네세스가 해결하는 패턴이 또 이어졌다.
김하성은 7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맞이한 세 번째 타석에서는 코빈의 바깥쪽 싱커를 공략했지만 2루 땅볼에 그쳤다. 샌디에이고도 연장 10회 3점을 허용하며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3-6으로 뒤진 연장 10회 말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다. 김하성도 한 몫을 거들었다.
샌디에이고는 승부치기 무사 2루 상황에서 선두 도노반 솔라노가 2루타를 때려 무사 2,3루를 만들었다. 이어 잭슨 메릴이 2타점 중전 적시타를 쳐 단번에 1점 차까지 따라붙었다. 여기서 김하성이 바깥쪽 승부를 모두 이겨내고 차분하게 볼넷을 골랐다. 이날 유독 바깥쪽 볼 판정 오심에 시달렸던 김하성이지만 평정심을 유지했다.
여기서 타일러 웨이드가 희생번트를 대 1사 2,3루를 만들었다. 데이비드 페랄타가 3루 뜬공에 그쳤으나 루이스 아라에스의 고의4구로 이어진 2사 만루에서 주릭슨 프로파가 극적인 2타점 끝내기 안타를 쳐 경기를 마쳤다. 2루 주자 김하성이 마지막 득점을 책임졌다.